몇 년 동안 손목 위에는 늘 애플워치가 있었다. 시리즈를 거쳐 울트라까지, 최신 기술이 집약된 기기는 분명 편리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손목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진동이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모든 전화와 톡 알림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정보의 과잉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스마트워치를 벗어던진 이유
심장박동수나 스포츠 기록 같은 기능은 단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다. 나에게 시계는 시간을 확인하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매일 밤 충전기에 걸어두는 수고로움은 참을만했지만, 여행지에서 전용 충전기를 따로 챙겨야 하거나 깜빡하고 충전을 못 해 꺼진 화면을 들고 나갈 때의 허탈함은 꽤 컸다.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보니 매번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 이었다.


다시 기계식 시계로 돌아온 서사

사실 기계식 시계가 처음은 아니다. 청년 시절, 해밀턴 기계식 시계가 있었다. 당시에도 그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좋아했지만,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처분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5년마다 돌아올 오버홀(Overhaul) 비용이 사회초년생이었던 나에게는 하루하루 큰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시계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흘러 다시 기계식 시계를 찾게 된 지금, 다행히 그때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지는 않다. 이제는 좋은 물건을 오래 곁에 두고 관리하며 사용하는 비용을 '낭비'가 아닌 '가치에 대한 예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아침 시계를 맞추는 의식
나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다. 고요한 이 시간에 기계식 시계의 몇초간 오차를 확인하고 용두를 돌리며 시간을 맞추는 일은 나에게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1분 1초를 금처럼 여기는 태도를 다시금 가다듬는 퍼포먼스처럼 느껴져 꽤 만족스럽다.


기계식 시계는 며칠만 차지 않아도 멈춰버린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향상, 멈춘 시계는 일종의 동기부여가 된다. 멈춰 있는 시계를 볼 때마다 내가 최근에 너무 정적인 시간을 보낸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태엽을 감으며 내 활동량을 직관적으로 체감하는 과정이 즐겁다.
1895년의 유산과 장인의 미학: 세이코 프레사지
너무 고가의 사치품은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모델은 평생을 함께하기에 부족했다. 관리만 잘하면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는 가치를 찾던 중 세이코 프레사지 에나멜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이 모델은 1895년 세이코 최초의 포켓워치인 '타임키퍼(Timekeeper)'에 대한 헌사다. 다이얼을 완성한 이는 50년 넘게 에나멜 공예에 매진해온 장인 요코사와 미츠루(Mitsuru Yokosawa)다.


그는 습도와 기후에 따라 에나멜 배합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단 0.1mm 두께의 무결점 코팅을 입혀낸다. 이 얇고 투명한 층이 만들어내는 백색은 사진 속 하이라이트 부분처럼 맑고 깊다.
금방 질리지 않는 적당한 화려함
시계를 고를 때 가장 경계했던 것은 과도한 화려함이었다. 너무 수수하고 단순한 모델은 금방 싫증이 나고, 반대로 보석이나 금장, 필요없는 문페이스 등 악세사리들이 과한 시계는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기에 부담스럽고 질리기 쉽다.

너무 화려한 물건은 처음엔 눈길을 사로잡지만 결국 금방 질리기 마련이다.
세이코 프레사지는 그 지점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제시한다. 멀리서 보면 단정한 드레스 워치지만, 가까이서 보면 에나멜 특유의 은은한 광택과 블루 핸즈의 색감이 적당한 화려함을 드러낸다. 쉽게 싫증 나지 않을 만큼의 절제된 미학이 담겨 있다.
본질에 집중한 단순함의 가치
많은 기계식 시계가 날짜창이나 여러 개의 서브 다이얼을 넣는다. 하지만 나는 오직 시간만 확인할 수 있는 타임 온리(Time-only) 모델을 선택했다. 기능이 많아질수록 유지보수는 까다로워지고, 맞춰줘야 할 정보가 많아지는 것은 또 다른 짐이 될 것 같았다.


내부에는 세이코의 상위 무브먼트인 6R5H가 탑재되어 있어 기계적인 신뢰도까지 챙겼다. 물 흐르듯 끊임없이 흘러가는 초침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디지털 숫자가 줄 수 없는 아날로그 특유의 생동감이 전해진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도구들의 기록
생각해보면 나는 늘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들에 애착을 느껴왔다.
- 초점을 직접 조절해야 하는 라이카 카메라
- 주기적으로 잉크를 채워줘야 하는 세일러와 라미 만년필
- 직접 손으로 기록하는 미도리 다이어리
- 온도를 맞춰 천천히 내려 마시는 차



이번 세이코 시계 구입도 그 연장선에 있다. 효율성만 따진다면 스마트워치가 압승이겠지만,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본질에 집중하고 싶을 때 아날로그 도구들은 훌륭한 파트너가 되어준다. 조금 느리고 번거롭더라도 내 손길이 닿아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들. 그것이 내가 기계식 시계를 곁에 두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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