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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방문기

서울의 시간을 걷다: 영천시장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의 기록

by wondolab 2026. 4. 14.

서울 서대문 일대는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뒤섞여 있는 동네다.

 

높은 빌딩 숲 사이로 좁은 골목이 불쑥 나타나고, 그 골목 끝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시간들이 붉은 벽돌의 형태로 남아있다. 하루를 온전히 비워 서대문 일대의 역사를 짚어보는 기행을 다녀왔다.

 

1. 활기와 온기가 교차하는 시작점, 영천시장

버스를 내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영천시장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이곳의 칼국수는 단순한 끼니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장 초입부터 풍겨오는 멸치 육수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유명한 칼국수집이 나온다.

 

 

단돈 4,000원에 수제비와 칼국수를 넉넉하게 담아내어 주는 그릇에는 시장 특유의 인심이 가득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마주하고 앉아 투박한 면발을 들이키면, 차가웠던 오전의 공기가 금세 잊힌다. 얼마 전 '놀면 뭐하니'에 잠깐 비친 덕분인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좁은 식당 안은 활기가 넘쳤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 사이에 섞여 앉아 칼국수를 즐기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니 비로소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 시간이 멈춘 근대 가옥, 경교장

시장을 빠져나와 조금 걷다 보면 강북삼성병원 부지 내에 덩그러니 놓인 서양식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경교장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버스 정류장 이름으로만 이곳을 기억하고 있겠지만, 한 번쯤은 안으로 발을 들여보길 권한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신 역사의 현장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화려한 근대식 건축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특히 김구 선생이 서거할 당시 입고 계셨던 피 묻은 저고리 앞에 서면, 그날의 긴장감과 슬픔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전해지는 듯해 마음이 엄숙해진다. 유품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곳이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우리 근현대사의 심장부였음을 깨닫게 된다.

 

 

 

3. 잃어버린 궁궐의 뒷모습, 경희궁

경교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희궁이 있다. 조선 후기 '서궐'이라 불리며 120여 채가 넘는 건물이 위용을 뽐냈던 이 궁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물을 헐어 다른 곳에 팔거나 옮겨버린 일제의 만행 탓에 현재는 단 다섯 채의 전각만이 복원되어 남아있다.

 

 

 

텅 빈 궁궐 마당을 걷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궁으로 들어서는 정문인 흥화문은 여전히 압도적인 위세를 자랑하지만, 그 앞에 깔린 아스팔트와 궁 내부의 현대식 조경은 옛 기운과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듬성듬성 남은 건물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풍경에서, 역사의 부침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실감한다.

게다가 경희궁을 검색하면 경희궁 X이가 나오는게 참 그렇다...

 

 

 

 

4. 희망을 꿈꿨던 붉은 벽돌 집, 딜쿠샤

다시 길을 잡아 언덕을 오르면 인왕산 자락에 자리 잡은 독특한 붉은 벽돌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을 가진 딜쿠샤다. 3.1 운동의 소식을 세계에 처음 알렸던 미국인 기자 앨버트 테일러의 집이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훼손되었던 이 집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테일러 부부의 흔적을 쫓다 보면, 낯선 타국 땅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그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도 기록을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삶을 마주하며,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기록한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5. 잊지 말아야 할 서늘한 기억,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일 때문에 몇 차례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지만, 오늘처럼 각을 잡고 정식으로 관람한 것은 처음이었다. 붉은 벽돌 담장이 주는 위압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촬영이 허락되지 않는 구역으로 들어설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울컥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좁은 감방 안에 갇혀 조국의 독립을 외쳤을 그들의 고통이 서늘한 벽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특히 사형장 앞에 서서 그 앞의 미루나무를 바라볼 때는, 그들이 느꼈을 마지막 공포와 답답함이 상상되어 숨이 턱 막혔다. 다행히도 그 무거운 공간을 진지한 표정으로 둘러보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을 보며, 이 역사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서대문 일대는 유독 역사적인 장소가 많다. 특히 길을 걷다 보면 잊고 지냈던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이 잦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작한 일정이었지만, 무언가 마음속으로 단단한 다짐을 안고 나오게 되는 서대문 여행이었다.